해체주의(Deconstructionism)무엇이 왜 위험한가?    

 

지금 이 세상은 이상하게 돌아가고있다. 이해 하려고 노력해도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일들이 주위에서 많이 일어나고있다. 가치관의 격차가 너무 커서 국민의 마음이 둘로 나누어진 사실이 미 대선을 통해 여실히 들어났다. 세대간 생각 차이도 매우 심각하다. 중요한 이슈를 놓고 자녀와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다고 많은 부모님들이 고민을 털어 놓는다. 그들 만의 고민일까

세대 간에  생각 차이가 점차 커지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21세기 사상의 큰 흐름인 해체주의(Deconstructionism)에 대해서 더 심층 깊게 공부 해 볼 필요성을 느꼈다.  여러 측면에서 질문을 하면서 관계 연구 논문들을  구글에서 찾아  보는데   이에 대한 연구 자료가 너무 방대한 것을 보고 해체주의가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 지를 재삼 확인했다, 

 그러면 해체주의 뿌리는 무엇이며 어떤 사상의 축에 반대해서 생겨 났는지 그 배경을 추적해보자.  해체주의 다른 Cancel culture는 다음기회에 다루기로한다. 부모, 교사, 영적리더들은 해체주의가 왜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인지, 그러나 그들 자신들과 속한 가정과 사회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거기서 찾아 낼 수 있는 지혜는 없는지, 그러나 어떤 면에서 위험한지, 어떤 함정이 있을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자녀들이 서 있는 입장을 있는 그대로 알아야 아이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해 할 수 있게되고 서로간에 공감이 이루어 질 때 차세대를 세계관의 혼돈에서 바르게 인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해체주의 (deconstructionism) 개념은 19세기말,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이자 포스트모더니즘의 원조인 니체(1844-1900)에서 나왔다. ‘영원한 세계’ 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삶에 대한 절대적 진리는없고 종교가 추구하는 절대 선이나 초월적가치를 부인한 니체는 플라톤이 세계를 현상계와 이데아로 구분한 이원론적 형이상학에 반대했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이분법이란 세상을 불변하는 존재(근원태, 참된세계 진리, 신의 나라 영원한것) 와 현상세계 (생성, 변화, 인간세계, 소멸하는 현상계)와 이원화하고 영원한 것이 소멸하는 현상보다 가치적 우월성을 부여하는 사유방식이다.  

니체가 세상 떠나기 16년전에 4부를 완성한 그의 저서 “차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은 죽었다.” 그래서 제한된 불완전한 인간이 신을 대신해서 자기자신이 절대자가 되어 인간적 제한을 극복하고 그 것에 의미를 주어서 모든 가치를 창조하며 살아가는 삶을 제시한다.  

 니체는 절대적 가치, 영원한 세계, 신은 없다고 했다 .  철저한 인본주의 사상으로 자기 내면에 있는 힘의 의지로 자기 극복과 새로운 창조로 나가는 인간은 자유하는 주인적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힘의 의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신을 밀어냈다. 기독교의 하나님 왕국, 칸드가 말하는 목적의 왕국에 반대했다.

그가 반기독교가 된 이유는 기독교 믿음의 공동체가 예수의 가르침의 본질을 떠나서 오랫동안 교리와 형식적 전통에 묵여 위선, 제도 안에 수직화된 힘에 치중하는 교회에 대한 실망과 영적 무능력에 강한 반발했다.  예수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거부했다고 니체 연구가들의 공통적 견해이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를 거부한 궁극적인  key factor를  외부에서 그 원인을 찾기 보다 니체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도 목사였고 할머니 어머니도 목사 가정에서 자랐고 종교성이 강한 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니체가 초등학교 입학도 하기 훨씬 전에 돌아가셨고 그후 일 년후동생의 죽음을 경험했다그러나 누구보다 어려서 부터 모범적인 교회생활을 했고 성경 암송을 잘했고 자기가 찬송을 부르면 교인들이 감동 받아 눈물을 흘린 것을 본 소년 니체였다. 외면적으로 비쳐진 그의 모습과는 달리 그의 내면 세계엔 기독교에 대한 갈등이 많았다. 그러기에 우리는 보이는 교회 생활만 보고 그가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인격적 교류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수 없다.

 만일 그가 하나님 말씀에 감동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하더라도 복음의 말씀을 듣고 진정한 죄 용서함 받은 확신안에 주님을 구세주로 영접 했는지에 대해 의문이 간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 하고 그와 인격적 만남이 있었다면, 하나님을 만날려는 간절함이 있었더라면, 그의 생각을 인간에게 올인해서 초점을 두고 인간으로 부터 답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길을 택했더라면 현실의 카오스에 너무 실망을 하지 않고 자신이 주장한 자신에게 주어진 난제에 의미를 부쳐 극복 하려고 노력했다면   그의 어머니가 신학을 권유했을 때 종교에 대하여 회의를 품고 신학대신 고전 인문학을 선택하진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가 예수 믿고 크리스쳔 세계관을 가진 철학자가 되었더라면 생각이 문득 들었다.  120년 동안 그 많은 철학자들, 젊은이들, 독자들, 문인들, 대중들...에게 큰 영향을 준 니체.  그가 죽은지 120이 지난 지금 대 다수의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져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는. 

니체 사상은 그가 죽은지 반 세기가 지난 1960년대 후반에 프랑스 철학자이며 교수인 데리다는 이성주의와 형이상학을 신랄하게 비판한 니체의 포스트모더니즘에 크게 영향을 받아 본격적으로 그의 사상을 발전시켜 문예비평 수단으로 세상에 내놓은 것이 해체주의(Deconstructionism)이다. 

 데리다는 니체처럼 절대 진리와 거짓을 분리하는 이분법의 경계선을 허물고 일원론을 주장했다. “악과 선, 진리와 거짓은 분리 될수 없고 같이 존재한다.”란 정의를 내렸다. 통일성이나 동일성을 배제 하고 차이점, 다른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해체이론을 통해서 이성과 질서, 총체성, 크리스쳔 세계관을 해체한다. 그리고 이성주의 부작용인 경직되고 획일화된 사고에 반대하고 절대적 진리를 배제하고 전통과 권위를 해체한다

 데리다는 "과거는 지나간 현제이고 미래는 곧 당도할 현제이다." 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현재이외는 존재 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따라서 "논리 중심의 대상인  기초와 원칙중심과 관계된 모든, 본질, 실체, 진리,  주 관, 의식. 초월성, 인식, 인간 과 신 과 같은   주제로 삼는 형이상학적 사상에 대항해서 반대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데리다는 형이상학적 생각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정신/육체, 주관/객관, 진리/허위, 텍스트/의미내면/표상, 본질/현상같은 "이분법적 대립을 버리도록 제안 한다." 그래서 전통적 의미와 함께 전통 자체를 해체한다. "로고스 중심 주의와의 단절 할 것을 제안한다.” 라고 선포했다. 결과적으로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니체 사상에 깊이 뿌리를 둔 반기독교적이다

 데리다의 철학과 문학적인 개념으로 적용한 그의 새로운 해체주의 비평 이론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 와 예일대학교를 중심으로 미국 학계에서 크게 환영을 받으며 대학가와 문학, 그 해석에 관해서 서구의 형이상학을 부정하고 페미니즘탈 식민주의탈 역사주의, 그리고 감성을 중시하고 여성, 아이, 유색인, 소외 받아온 비주류를조명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그는 죽었지만 해체사상 흐름은 스마트폰 발전과 SNS 그리고 주류 언론과  함께 더 증가될 것이다.

 그러나 해체라는 말 때문에 뭐든지 원하는대로 막 해도 된다고 생각해선 곤란하다. 애초에 데리다가 주장하는 바는 "모든기준을 배척하고 파괴주의에 빠지자" 라는 무조건 카오스 (chaos)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성의 부작용인 경직되고 획일화된 사고에 반대했다. 그동안 이성에 밀려 무시 받아왔던 감성 그리고 사회적으로 밀리고 그늘에 있던 소외자들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도 모색해 보려는 의도가 해체주의의 본래 취지었다. 

그러나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점점 도를 넘어서 21세기 지금은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저항이론이 너무 지나치게 문화적으로 극단화되면 사회의 질서가 무너진다. 전통을 배제하고 권위는 억압이라고 단정해서 인정하지 않는다. 무책임한 자유방임이 허용되기쉽다. 국가 사회와 가정을 바쳐주는 절대적 진리(absolute truth)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것을 상대적 가치(relativistic truth)로 받아들일 때 가정과 교회, 학교, 사회가 기준이 없어져 흔들린다. 가정에 기준이 해체되면 신뢰, 존중, 순종보호가 부재하게 되고 가정이 더이상 피란처가 되지 않고 힘을 잃게된다. 부모의 권위를 자녀가 인정하지 않으면 자녀가 곁길로 가서 가족 모두가 고통을 받기 쉽다. 

 1970년대에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현대인의 사상(도덕,성윤리,가정관, 국가관), 문학 해석, 세계관에 큰 영향을      주었을 뿐만이 아니라 건축과 예술, 영화, 패션분야에도 영향을주고있다파괴 또는해체, 행위적 관점에서 부정적 경향이 강한 예술사조로 해체주의가 아직도 크게 영향을미치고있다. 해체주의적 개념이 건축 디자인에도 영향이 나타났고 해체주의 건축물들이 세계곳곳에서 세워지고 있다

그러나 해체주의를 관계면에서 긍정적으로 수용 할 때 수직관계로 억압되어 었던 관계가 수평적 개념으로 상하 지위를 차별없이 인격과 개인의 존엄성을 존중해 준다.  새로운 아이디어나 다른 의견 내 놓는 일과 비판이나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적어지면  개인 안에 있는  잠재력을 깨워 키울 수 있다는 긍정적 면을 발견 할 수 있다. 그럴 때 내면에서 자기 동기 개발이 나올 수 있다. 놀라운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일은 권위자가 선한 의지로 자기 힘을 다른 사람을 위해 쓰고자 하는 의지로 수직관계의 한계를 넘어 수평관계로 접근할 때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해체주의 건축양식으로지어진 멋있는 예술적 건축물에 들어난 문제점들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삶의 진리를 발견 할 수 있다. 모더니즘은 이성적 디자인 이어서 실용성 면에서 심각한 결함이생기는건 드물었다. 워낙 단순하게 생겼고 기초와  기둥을 잘 세웠다. 그러나 해체주의 건축은 창의성 강조와 자유로운 방식으로 기둥을 세우는 것을 될수 있는대로 피했기 때문에 비가 오면 샌다던가 쓸수 없는  공간이 지나치게 많이 발생하는...등 문제가 많다.   우리 인생도  삶을 지탱해주는 확실한 기초와 든든한 기둥이 세워 있을 때 유혹과 인생을 흔드는 환란도 잘 지탱해 나갈 수 있다.  반면에 기둥이 있어야 할 곳에 바쳐주지 않으면 무너진다.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우리 삶의기둥이다.    

부모는 해체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우리 자녀들이 세계관의 전쟁을 치르게 된다는 사실을 부인 할 수 없다. 세계관을 이해해야 영적전쟁을 이해할 수 있다. 선과 악의 경계가 흐려지고 무조건 자유를 주장함으로 하나님 말씀을 해체하고 그의 창조 질서를 해체하는 세상 문화가 아이들 손에 있는 스마트폰을 통해서 수시로 자녀들에게 접속한다.  “그러면 우리는 급변하는 세상에서 자라고 있는 자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할 것이다.

첫째로 우선 아이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찌 첵크 리스트를 만들라고 권하고 싶다. 그 중 하나는 당신 아이가 집을 떠나기전에 성경적 세계관을 갖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그리 만만치만은 않다. 세상 문화의 흐름을 역류해서 나가야 하기 때문에 어렵다.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하다. 기회를 놓치지 말고 어릴 때 (4세-14세 window) 염두에 두고 복음을 아이들 마음에 심어주도록 해야 한다는 칼럼을 올린 적이 있다. 하얀 헝겁에 파랑 물감을 들이긴 쉽다. 하지만 먼저 다른 짙은 색으로 얼룩져 있으면 파랑 물감이 들여지지 않는다. 이처럼 아이들 마음이 가장 순수 할 어린 나이에 진리의 복음 말씀이 들어가야 한다.  

두 번째로 자녀와 수직관계로 무조건 부모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아야한다. 부모의 진정한 권위는 아이가 부모의 삶을 보면서 삶을 움직이는 믿음을 부모로부터 배우면서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주어진다. 자녀가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알고 느낄수 있으면 좋겠다. 당신의 가정은 자녀가 희망의 언어를 먹고 자라는 안전한 피난처인가?   당신 가정은 실망, 실수, 부정적인 감정, 잘못된 행동까지도 품고 믿어주고 용서 하는가?  

 세 번째로는 대화의 창을 열고 아이들이 질문을 자유롭게 하도록 자주 기회를 만드는 것이 좋다.  당신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 할 때  (open-end식)도  내가 모든 대답을 가지고 있다는 식의 닫힌 대화가 아니라 열린 대화방식이 필요하다. 

네번 째로는 부부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자녀들에게 큰 축복이다. 존중과 배려 가운데 사랑. 마음에 크게 작정하고 노력해야 한다. 말을 듣고 반응할 때도 한번 더 생각하고 걸러서 말하자,  부부가 서로 사랑 할 때 아이들에게 건강한 사랑을 줄 수 있다. 서로 사랑하는 부모 모습을 보고 성장한 자녀들은 권위에 대해서 긍정적이고 안정감을 갖고 부모를 존경한다. 그리고 부모님이 믿는 하나님을 거부하는 경우가 드물다. 신뢰와 사랑가운데서 가족간에 끈끈한 연대감이 있을 때 자녀 마음이 복음의 씨를 받아들여 싹을 티우고 자랄 수 있는  좋은 마음 밭이 된다.  

결론으로 자녀가 흔들리지 않는 크리스쳔 세계관을 갖고 매일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들으며 기도 안에서 교재할 때 하나님과 접속된 생활이 된다.  세상에 큰 변화를 몰고오는 여러 사상들이나 해체주의 물결에 휩쓸려 가지 않는다.  하나님 말씀이 기준이 될 때  취사선택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신다.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잘 못된 것은 버릴 줄 아는 능력을 갖게 된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같이 하나님 말씀으로  생각과 마음이 채워져 있으면 우리 자녀들는 세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변화시키는 자로 살아 갈 것이다.